세계 유산 후보로 지정된 성당들을 견학을 하실 때에는 【사전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오우라 천주당의 경우는 예약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전 예약 번호

성당 견학에 있어서의 부탁

성당은「기도하는 장소」이므로 예절을 지켜주시고, 경건한 분위기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견학하여 주십시오.
성당 행사(미사, 결혼식, 장례식) 등에 의해 견학을 할 수 없는 경우, 한번에 많은 인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 등으로, 견학을 희망하시는 분들께 【사전 예약】을 요청드리고 있습니다.

성당 방문시 지켜야 할 매너

  • 제단 (내진)은 신성한 장소이므로 절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합시다.
  • 미사는 신성한 예식입니다. 사진촬영은 삼가해 주십시오.
  • 성당 내에서 음식, 음주, 흡연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 성당 내에는 여러가지 제례품, 장식물 등이 있습니다. 함부로 손을 대지 않도록 합시다.
  • 기도의 장소이므로 조용히 견학합시다.

map

Oura Cathedral and its precinct

Shitsu Church and Former Shitsu Aid Centre buildings

Ono Church

Hinoe Castle

Hara Castle

Kuroshima Church

Tabira Church

Kasuga village and sacred places in Hirado

Nokubi and Funamori settlement sites on Nozaki Island

Kashiragashima Church

Former Gorin Church

Egami Church

Sakitsu Village in Amakusa

기도의 길을 걷다.

세계 문화 유산을 목표로 하다.
「나가사키의 성당들과 가톨릭 관련 유산」을 순례하는「마음의 여행」

2007 년1월, 「나가사키의 성당들과 가톨릭 관련 유산」이 세계 문화 유산 잠정일람표에 등록되었습니다.「나가사키의 성당들과 가톨릭 관련 유산」은 메이지 · 다이쇼 시대에 세워진 성당 등 문화재와 사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톨릭의 번영과 박해, 잠복과 부활이라고 하는 극적인 역사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1865년 신자 재발견 후, 가톨릭이 묵인된 것은 1873 년 금교령 게시문이 철폐된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세워진 성당들은 박해에서 해방되어 신앙의 자유를 얻은 신자들의 기쁨의 상징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척박한 땅에 힘겹게 세운 성당의 대부분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신앙을 이어 온 마을에 세워진 것으로, 그들은 가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재산과 노동을 바쳐「신앙의 증거」로써 만들어 올린 것입니다. 아울러 성당들의 대부분은 외국인 신부의 지도에 의한 서양 건축 기법과 데쓰카와 요스케 등 일본인 도편수의 전통적 기술에 기초한 창의적 공법으로 건설되었고, 동서양의 건축문화가 융합된 세계적으로도 그 예가 드문 교회 건축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성당 건축물들과 순교지 등 가톨릭 관련의 문화재와 사적을「순례지」라고 부르고, 최근에는 이곳을 순례하는「성지순례」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순례」라고 하는것은 단순히 성당과 순교지를 방문해서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순교한 순교자들과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의 방식, 철학 등을 생각해 보는「마음의 여행」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이「성지순례」를 계기로, 나가사키현에 방문하시는 분들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는 일본 가톨릭의 역사, 문화적 유산 등에 대해서 더욱더 많은 이해와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교

대항해시대, 동남아시아와의 무 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은 포르투칼은, 또한번의 동아시아와의 무역을 획책하였습니다 . 1557년에 명 나라으로부터 마카오를 양 도 받아, 마카오를 거점으로 동아시아와의 무역을 추진해 왔습니다.

포르투칼의 동아시아 진출에 크게 관여한것이, 천주교 가톨릭교회의 예수회 였습니다. 당시의 유럽은,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의 바람이 거칠게 불고있었고, 가톨릭측은 교회의 쇄신을 꾀하기 위해 힘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중에서, 가톨릭교회의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등에 의해 예수회 라고하는 수도회가 설립되고, 그들은 포르투칼이 무역의 상대로 하는 동아시아를 새로운 선교처로써 눈을 돌렸습니다.


포르투칼인이 일본에 왔을 때의 그림 병풍
(나가사키 역사문화 박물관 보관)
동아시아에서 선교를 하 고있던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는 말 라카에서 한명의 일본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일본에 눈 을 돌려 , 1549년 가고시마에 건너와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가고시마에서는 생각한대로 선교의 성과를 얻지못하고 다음해인 1550년 8월, 하비에르는 포르투칼선에 당 시국제무역항으로써 번 영하고있던 나가사키현의 히 라도에 입항하였습니다. 무역은 선교가 조건이었기 때문에 영주인 마츠우라 타카노부는 히라도에서의 선교를 인정하여, 그때부터 시작해서 나가사키현에 천주교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히라도에서의 선교는 성과를 올렸고, 하비에르가 히라도에 체 재 한 약 한 달 동 안 에 1 0 0 명 정 도 가 천주교인이 되었다고 알려지고 있 습니다. 그러나, 마츠우라 타카노부는 포르투칼선의 내항을 크게 환영은 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 지 나 무 역 의 이 익을 목 적으로 한 것 으 로 , 천 주 교 의 선 교 에 관 해 서 는 협력적이지 않았습니다 . 그런 타카 노부의 태 도 에 실 망 한 선 교 사 들 은 무 역 항 을 히 라 도 로 부 터 , 천 주 교 에 호 의 적 이 었 던 오오무라 스미 타다의 영지인 요 코세우라 (사이카이시)로 옮겼습니다.

발전

1562년,오오무라령 요코세우라에 포르투칼선이 입항하고, 남만무역항으로써 개방 되었습니다. 영주인 오오무라 스미타다는 25명정도의 중신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일본최초의 크리스챤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요코세우라는 무역항으로써 번영하였지만, 스미타다가 영내의 신사와 절을 불태우는 등, 공격한 것에 대하여 , 반 스미타다 파는 쿠테타를 계획하였습니다. 개항으로부터 약 2년뒤 의형제인 츠카자키의 (현재의 사가현 타케오시 )성주인 고토 타카아키라의 쿠테타에 의해 요코세우라는 공격을 받고 불에 타, 결국에는 폐항이 되었습니다.

그 후, 오오무라 영내의 후쿠타항(나가사키시)과 스미타다의 형이 다스리는 아리마 영내의 쿠치노츠 항에 무역의 창구가 옮겨지던 중 스미타다와 함께 세례를 받은 가신 나가사키 진자에몬이 다스리는 587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평정에 의해 류조지를 대신해 노력을 확대 해오던 시마츠가

무너져, 오오무라령을 위협하는 것은 일단 없어졌지만 같은해 권력통일을 노리던 히데요시는 크리스챤에게 위협을 느껴 고카죠로부터 선교사추방령을 발령하였습니다. 예수회로부터 나가사키, 모기, 우라카미를 몰수하고 직할지로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뒤 히데요시는 고치에 표착한 스페인의 산 페리호선원의 발언을 이유로 크리스챤을 일제히 체포하도록 명령하였습니 다. 이 명령에 의해서 교토와 오사카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 6명과 일본인 크리스챤 18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귀가 잘리거나 교토와 오사카등에 끌려다닌 뒤 쿄토부터 나가사키까지 800km의 도정을 맨발로 걸어서 호송되어, 그 도중에 두명이 더해져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의 니시자카의 언덕에서 26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크리스챤이 많이 살고있는 나가사키에서 본보기로 처형된 것이었습니다.


요코세우라 공원에 있는 도판에는,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고 있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사이카이시)
그러나 순교자의 모습은 크리스챤의 신앙을 더욱 높게하고 , 나가사키와 우라카미는 각지에서 배척된 크리스챤들의 안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선교사 추방령은 내려졌지만 히데요시가 무역의 이익을 우선시하였기 때문에, 나가사키는 포르투칼과의 무역에 의해 번영하고 감시의 눈이 있긴했지만 크리스챤의 마 을로써 존속해 왔습니다. 미 사키 성당은 주교좌 성당이 되어 수도회와 신자들이 만든 성당들, 사제를 양성하는 교육시설, 교리서등을 만드는 인쇄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네 이 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 라’ 를 기본이념으로하는 복지사업을 행하는 공동체도 있어 나가사키는 금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일본의 선교의 중심지 였습니다.

금교

1587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평정에 의해 류조지를 대신해 노력을 확대 해오던 시마츠가 무너져, 오오무라령을 위협하는 것은 일단 없어졌지만 같은해 권력통일을 노리던 히데요시는 크리스챤에게 위협을 느껴 고카죠로부터 선교사추방령을 발령하였습니다. 예수회로부터 나가사키, 모기, 우라카미를 몰수하고 직할지로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뒤 히데요시는 고치에 표착한 스페인의 산 페리호선원의 발언을 이유로 크리스챤을 일제히 체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 이 명령에 의해서 교토와 오사카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 6명과 일본인 크리스챤 18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귀가 잘리거나 교토와 오사카등에 끌려다닌 뒤 쿄토부터 나가사키까지 800km의 도정을 맨발로 걸어서 호송되어, 그 도중에 두명이 더해져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의 니시자카의 언덕에서 26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크리스챤이 많이 살고있는 나가사키에서 본보기로 처형된 것이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크리스챤 금제정서
(마츠우라 역사자료 박물관 보관)
그러나 순교자의 모습은 크리스챤의 신앙을 더욱 높게하고, 나가사키와 우라카미는 각지에서 배척된 크리스챤들의 안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선교사 추방령은 내려졌지만 히데요시가 무역의 이익을 우선시하였기 때문에, 나가사키는 포르투칼과의 무역에 의해 번영하고 감시의 눈이 있긴했지만 크리스챤의 마을로써 존속해 왔습니다. 미사키 성당은 주교좌 성당이 되어 수도회와 신자들이 만든 성당들, 사제를 양성하는 교육시설, 교리서등을 만드는 인쇄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를 기본이념으로하는 복지사업을 행하는 공동체도 있어 나가사키는 금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일본의 선교의 중심지 였습니다.

박해・잠복

그러나 히데요시 뒤에 일본을 통치한 에도막부는 1614년 1월에 전 국에 금 교령을 발포하고 선교사와 타카야마 우콘등 주된 크리스챤을 국외로 추방시켰습니다. 나가사키의 성당은 1619년까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추방후, 다 시 들어와 숨어서 선교한 선교사와 남아있던 선교사, 그 활동을 지지한 크리스챤들이 포박되어 고문을 받고 종교를 버리지 않 았던 사람들이 니 시자카등에서 순교하였습니다.

1637년 시 마바라의 농민의 대 관 공격 을 계 기로 기아와 무거운 세금에 고통받던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막부는 크리스챤봉기로써 철저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천주교 박해를 더욱 철저히 하고 나가사키에 데지마라는 인공섬을 만들어 쇄국정책을 취하고 해외무역은 유럽에서는 네덜란드만을 인정했습니다. 1644년에는 코니시 만쇼 신부가 오사카에서 순교하고, 일본에 남아있는 사제는 한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1657년에 오오무라에서 숨은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발견된 것으로 고오리 쿠즈레 , 그 이후 슈우몬아라타메와 후미에,테라우케, 오인조등의 단속과 감시에 의해서 크리스챤 박해가 더욱 더 철저하게 되었습니다.


눈의 산타마리아
(일본 26성인 기념관 보관)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라카미와 소토메, 이키츠키, 히라도등에서는 숨어서 천주교를 지켜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불교도인 척 하며, 신부가 없는 가운데 리더를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고 세례, 기도등을 전승하였습니다. 발견되면 바로 죽음을 당하던 시대, 천주교신앙을 계속 지킨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한 일이었습니다.

또 경사면에 퍼져있는 좁은 계 단밭의 척박한 토지를 경작해나가면서 남몰래 신앙을 계속지켜온 소토메의 크리스챤들은 그 당시 고토 번주가 오오무라 번주에게 농민을 보내줄 수 있도록 부탁하였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고토로 이주했습니다. 고토에 가 면 크리스챤의 단속도 심하지 않을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약 3000명의 크리스챤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갔습니다.

부활


창건 당시의 오오우라 천주당 복원 정면도
(오오우라 천주당 보관)
잠복 크리스챤들이 숨어서 신앙을 계속 이어오던 중 1853년의 페리의 외국함선이 내항 후 막부는 미국,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 화친조약을 맺고 1858년 2월에 나가사키 부교가 후미에 중지를 선언하였습니다. 같은 해 프랑스를 더해 5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개항하고 다음해 나가사키에 먼저 개신교회의 선 교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같은해에 에도에 들어 온 가톨 릭의 파리외방선교회가 1863년 나 가사키의 외국인 거류지에 외국인을 위한 성당 ‘오오우라 성당’을 건설했습니다. 그 곳을 나가사키의 마을 사람은 프랑스절이라고 부르고 건설 도중부터 많은 사람이 구경하러 몰려 왔습니다. 선교사들은 잠복중의 일본인 크리스챤을 찾아내고 싶다는 염원으로부터 건물의 정면에는 일부러 “천주당”이라고 한자로 표기 했습니다. 그 선교사들의 염원이 닿아 오오우라 천주당에 우라카미의 잠복 크리스챤이 방문하였습니다.

그것은 1865년 2월 오오우라 성당의 봉헌식이 행해진 뒤 바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산타마리아 상을 찾아 나가사키 우라카미에 잠복하고 있던 신자 십수명이 오오우라 성당의 프치쟌신부의 앞에 나타나 자신들이 크리스챤인 것을 밝 혔습니다. 그것이 교회사의 기적이라고 불려지는 “신자발견” 이라는 사건으로 일본에서 재 선교시대의 막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은 아직 금교령하에 있었습 니다. 우라카 미의 신 자가 신앙을 밝힌 것 으로 에도막부에 이어서 메이지정부에 의한 우라카미 욘방 쿠즈레(네번째 박해)라고 하는 우라카미 무라의 촌민의 대부분이 체포되어 유배되는 박해사건이 일어났 습니다. 더욱이 고토 , 소토메 등에서도 크리스챤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건이 여러 외국에서 비판을 받자 신 정부는 천주교를 묵인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1873년 정부는 금교령 방을 철거하고 약 250년에 달하는 금교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천주교의 신앙을 허락받은 크리스챤들은 기쁨에 가득차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위하여 우선 자신들의 성당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성당 대부분은 숨어서 신앙을 계승해 온 사람들이 살았던 시골 촌락등에 세워졌습니다. 성당 건설에 있어서는 남녀노소를 불 문하고 해안으로부터 조금 높은 언덕까지 자 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의 벽돌을 짊어지 고 옮기는 등의 이만저만이 아닌 노동 봉사가 있었습니다. 신부 지도하에 가난한 생활 속에서 신자들이 노력하여 자금을 모으고 노력을 바쳐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성당 건설은 탄압을 피하여 잠 복하고, 신앙을 계속 지켜온 신자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는 실로 “신앙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현재, 국토의 1%의 면적밖에 없는 나가사키현에 전국의 가톨릭 성당 10% 이상에 해당하는 130여개의 성 당이 있습니다. 몇대에 걸쳐서 열심히 살아 온 사람들이 겨우 세우는 것이 가능했던 나 가 사 키 현 의 성 당 . 이 역 사 를 생 각하면서 걸어 보면 4 5 0 년 전에 전해졌던 신앙이, 계속 살아 전해진 그 증거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오오우라 천주당 신자발견 100주년 기념비


신자발견시 신자들이 봤다고 알려지는 마리아 상
(오오우라 천주당)

세계 유산 후보

오우라 천주당과 관련시설오우라 천주당과 관련시설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소토메의 시쓰 취락소토메의 시쓰 취락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소토메의 오노 취락소토메의 오노 취락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구로시마 섬의 취락구로시마 섬의 취락
나가사키현 사세보시
히라도 성지와 취락히라도 성지와 취락
나가사키현 히라도시
구 노쿠비 성당과 관련유적구 노쿠비 성당과 관련유적
나가사키현 기타마쓰우라군 오지카쵸
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가시라가시마 섬의 취락
나가사키현 미나미마쓰우라군 신기미고토쵸
Former Gorin Church히사카지마 섬의 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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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성터하라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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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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